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오늘은 뭘 했지?
오늘은 개강날이었다.
학교에 신입생들이 우글우글거렸다.
아침에 공승현 교수님의 특강 - 항공우주통신시스템 강의를 들어갔다.
오랜만에 강의를 들으니 방학동안 흐트러져 있던 머릿속 엔진이
다시 시동이라도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CDMA(Code-division Multiple Access)에 굉장히 관심이 갔다.
청강이라고 말씀도 드렸고, 이번 학기 계속 듣고 싶은 강의가 되었다.
단지 수강생이 오늘 2명 밖에 출현(?)하지 않아서.. 폐강되지만 않기를 바랄 뿐.
월 수 금 11시 ~ 12시 강의. 기억할 것.
끝나고 실험실에 갔더니 전필은 선배님이 앉아계신다.
아니 이 분은 대한항공 출퇴근 하시면서
항상 저녁 8시 이후로만 오시던 분인데 어쩐 일로 낮에 계시는 걸까?
여쭤봤더니 짤리셨단다.
아니 그렇게 갑작스럽게? 하루아침에?
저번주까지만 해도 차세대 헬기의 테일로터 설계를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까지 해주시던 분이..
그냥 짤렸단다.
테일로터 설계가 끝났댄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농담하시는거죠? 그랬더니
뭐 그게 대수냐고 신경쓰지 말고 할 일 하랜다.
한 90% 정도 진지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거 믿어야 하는건지..
나를 놀리려고 농담을 하시는건지.. 아직 감이 안 잡히네.
열심히 수강신청을 하고 시간표도 짜고 하시는 걸 보니
정말 일 안나가시고 전일제로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시려는 건지..
내일부터는 아침 9시부터 오실 예정이라는데..
그럼 정말인걸까..?
뭐.. 알게 되겠지. 내일이면.
하여튼 전필은 선배님에 대한 아리송한 생각을 가진 채로 그 바로 옆에서
금요일날 하다가 못다한 충격실험을 오후에 마무리 지었다.
퀘스트 의뢰자(!)인 박상오 선배님이 되게 기다리셨나 보다.
주말동안 다 했겠지 라고 생각하셨겠지.. 아마.
난 주말에 하려고 했다... 진심으로 ! 그런데 오밤중에 기계동 출입문에서
"귀하의 카드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걸 어떡해.
하여튼, 오늘 오후에 마무리를 지어서 결과를 드리기는 했는데
나중에 퇴근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데이터가 좀 시원찮은 모양이다.
다시 실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동안 자주 보던 연구실 선배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대신에 이제 우리 연구실에 새로 온 석사 1년차 선배들.. (나는 석사 0년차니까)
전부터 알고 있던 태훈이형과 길상이형을 만났다. (송씨, 손씨)
그리고 나머지 두 분은 아직 잘 모른다. 이제 차차 알아가겠지.
그리고 다른 연구실이긴 한데 방유진이라는 형님을 만났다.
충격실험 하고 있는데 상우(항공 05)가 석사 1년차 처럼 보이는 세 명을 끌고다니면서
실험실마다 구경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세 명 중에 두 명은 상우가 있는 심현철 교수님 연구실 신입이었고,
다른 한 명이 바로 나중에 얘기하면서 알게 된 유진형님이었다.
초면에 인사만 하고 다른곳으로 또 구경하는 것을 보며 나는 실험을 끝냈고, 책상에 앉아 우주의 무한한 비밀과 인생의 무상함과 실험실 슬리퍼에서 나오는 발냄새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 갑자기 기숙사에 슬리퍼가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잡화점에 갔다.
잡화점에 가는 길에 태울관 미래홀을 들렀다.
난 태울관 갈 일이 있으면 거의 열 번에 여덟 번 정도는 미래홀을 문짝을 들춰본다.
여기 무대 위에 있는 피아노가.. 페달은 고장났지만 타건감이 굉장히 맘에 든다.
그래서 사람이 없으면 조금씩 치다가 나온다. 오늘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신나게 건반들 때리다가 한 30분쯤 됬으려나..
정리하고 나오는데 어두운 관객석 뒤쪽에 왠 학생 두 명이 앉아있는 것이었다.
보통 누가 피아노 치고 있으면 피아노 치러 온 사람은 살며시 지나가주는 게 예의고
일이 있어서 온 사람이라면 올라와서 "죄송한데요.." 라고 말하고 끊는 게 예의.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뭘까..
살짝 이해가 안 가기도 하면서
왠지 내가 당한 듯한 느낌도 들고.
하여튼, 그러고 잡화점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필요한
목욕바구니, 비누, 비누통, 샴푸, 린스, 샤워타월, 페브리즈를 샀다.
슬리퍼를 사지 않았다는 걸 기숙사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나 참... 슬리퍼 때문에 잡화점을 갔는데 그것만 빼고 다 사다니 어이가 없다.
잡화점에서 고교 동기 도한이를 만나서 바디샴푸 먹는얘기를 좀 했더니 정신이 나갔나보다.
그렇게 바리바리 사서 들고 오는데 아까 그 견학하던 유진형님이
"바쁘지 않으시면 얘기 좀 할까요?" 이러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나 바쁘지 않다.
기계동 로비에 않아서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었다.
78년생. 석사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33세의 나이.
이 형님은 20대 초반에 공부에 흥미가 없어 대학도 때려치우고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뒤늦게 '아 사람이 공부를 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2005년 항공대에 입학,
그리고 이제는 카이스트 항공과에 석사로 들어오시게 된 것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도 해 드렸다. 서로의 상반된 인생사에 흠칫 놀람.
이번에 항공과에 새로 오신, 위성항법을 하시는 이지윤 교수님 연구실에 단독으로 계신단다.
신생랩이라 선배도 없고, 석사 한명만 달랑 있기 때문에 연구실 가족이 교수님과 유진형님 단 두 명 뿐.
그런데 이번주에 이지윤 교수님이 출장을 가셔서 굉장히 심심하시단다.
하긴.. 카이스트에 아는 사람도 없을테고.. 굉장히 심심하긴 할 거 같다.
시간이 되면 학교 돌아다니면서 안내도 해 드리고 했을텐데
6시 중창연습이 있어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기숙사도 6동 2층이라니까 앞으로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아까 잡화점을 나서면서 합창단 후배 지혁이를 만났다.
지혁이는 나하고 닮은 점이 많아서 그런 걸까.. 정말 챙겨주고 싶은 동생이다.
전자과에서 올해부터 학부과정 중에 미국 조지아텍으로 가서 복수이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고 한다.
지혁이와 성열이가 거기 지원을 해서 되긴 되었는데
학비가 1년에 6~7천만원 정도라고 하니 금전적으로 보통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봄학기 동안 여러 장학재단들에 물어보고 지원을 요청해 본단다.
지원해준다는 데가 없으면.. 금전적으로 너무 어려우니 못 가는 거고,
만약 지원해 주는 재단이 있다면 좋은 기회니까 꼭 가서 해 보라고 권했다.
합창단의 악보부장... 이라는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고민이라고 하는데..
회장이나 부지휘자가 아닌 이상, 그 정도 기회가 생긴다면 가는게 맞다고 본다.
뭐 그러다가 저녁을 같이먹자고 얘기를 했는데
중창 연습이 6시에 잡히는 바람에 못 먹었고, 다음을 기약해야지.
6시 중창연습. 나는 원래 8시 인 줄 알고 있었다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 달려갔다.
찬호, 현석이형, 항성이형, 깡주.
이 사람들과 맞추는 하모니는 정말 세상 만사를 잊게 해 줄 정도로 좋다.
오늘도 역시 곡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을 하...려고 했으나,
남정네 다섯이 모여 킥킥대는 걸 멈출 수가 없었고
연습시간 중 절반 정도는 영양가 없는 드립으로 채워졌다.
깡주가 감기 걸린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고.
뭐 하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맞춰볼 때는 그럴싸했으니까.
내일부터는 밤 10시 모임으로 고정. (신환공연 전까지. 금요일만 뺴고)
중창연습이 끝나고 찬호 차를 타고 궁동으로 가서 지휘자샘이 추천하셨다는
향촌 곱창 전골을 먹고 왔다. 그리고 동방에서 잠시 깡주와 피아노질.
자보를 만들고 있었다. 신환공연 자보. 그리고 나중에는
오랜만에 동방에 오신 성민이형(개따형)을 볼 수 있었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오신 듯한데,
그때는 수현이와 자인이와 민주와 희원이가 쌍쌍으로 피아노에 붙어앉아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날이 창창한 후배들이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
선뜻 칠 수가 없으셨나 보다.
피아노를 하나 더 늘려야 되나..!?
동방도 하나 더 늘리고..?!
하여튼,
그리고 10시가 되었다.
문지동 사는 희원이와
화암굴 사는 깡주는 버스타러 가고
나도 기숙사로 돌아오려는데 연구실에 놔 둔 샤워도구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기계동 연구실로 가서 그것만 가지고 나와야지 했는데..
가 보니 전필은 선배님이 아직도 계셨고,
바로 나오기 뻘쭘해서 어차피 할 거 내일 서류 준비 할 것들 좀 정리하고,
공부 좀 하는 척 하다가 12시가 되서야 나왔다.
굉장히 긴 하루처럼 느껴진다.
왠지 정리를 해 두고 싶어 늦었지만, 피곤을 감수하고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만큼 하루 동안 많은 걸 했다는 징표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요인인 듯 하다.
...